효자 장오로의 묘

효자 장오로의 묘(도쿄도 지정 구역)
오시타테의 공동묘지 안에는 효자 나가고로의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의 한쪽에는 나가고로의 경력을 기록한 비석(칭덕비)이 세워져 있습니다.
나가고로는 오시타테 마을에서 태어난 농민으로,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한 덕분에 근처에서 알려지게 되었고, 에도 시대 중기인 간포 원년(1741년)에 막부로부터 포상을 받았습니다. 효행의 상으로 은화 20매를 받았고, 그 후 이 근처의 공터와 그 개간료를 받게 된 나가고로는 2정보 이상의 농지를 개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땅은 공동묘지의 서쪽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효자면"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와 같은 효자 장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는 바가 많고,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송덕비를 세울 때 필사된 "효행 장오로에 관한 하조서"(압립・가와사키 세이케 문서, 쇼와 2년)라는 사료에 포상 경위와 장오로의 경력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개요를 소개합니다.
장고로의 성장 배경
장고로는 겐로쿠 3년(1690년) 오시타테촌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장고로의 집은 결코 부유하지 않았고 7간X3간 반의 작은 땅기둥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6세 때 아버지를 잃고, 14세 때에는 함께 살고 있던 누나 부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혼했지만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후처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 후, 80세가 넘는 어머니와 세 명의 자녀를 부양하는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계속되었지만, 그 효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동사료에 따르면, 몇 가지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농사일 틈틈이 그는 장작을 주워서 팔러 나갔습니다. 어머니가 원래 술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장작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어머니를 위해 술을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여름밤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밤새 어머니의 베개 곁에서 모기를 쫓았고, 겨울밤에는 화로 곁에 눕혀두고 자신의 옷을 벗어 어머니에게 입혔습니다.
에도 막부로부터의 포상
이러한 행위가 인근 마을들에까지 전해져, 오시타테 마을의 명주로부터 오시타테 신덴을 지배하는 대관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에도 막부의 사원 관리로, 간토 각지의 신전 및 치수 정책을 담당하는 간토 지방 고용가라는 직책에 있던 오오카 에치젠노카미 다다마사에게까지 보고되게 되었습니다. 오오카 다다마사는 에도의 관청으로 나가로를 호출하여 그의 효행을 칭찬한 후, 은화 20매와 논 7반보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오카 에치젠의 포상은 단순히 그의 행위에 감동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행된 교호 개혁의 포상 정책 중 하나로 위치 지어지며, 막부의 농촌 지배의 일환으로 실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가로는 보령 11년(1761년)에 71세의 생애를 마감했지만, 그로부터 48년 후의 문화 6년(1809년), 교카사로 알려진 오오타 난부(촉산인)는 막부의 지배 계산역으로서 다마가와 순찰 중 이곳을 방문하여 나가로의 이야기에 감동하여 노래를 지어 그의 행위를 찬양했습니다.
(참고 자료. "이나기시사" 상권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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