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갱신일:2017년 6월 27일
타카코 나가고로의 무덤과
오시타테의 공동묘지 안에 타카코 나가고로(고시초고로)의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의 일각에는 나가고로의 경력을 기록한 비석(쇼토쿠비)이 세워져 있습니다.
나가고로는 오시타치마을에서 태어난 농민으로, 어머니에게 효양을 만든 것으로 근향에 알려져, 에도 시대의 중반의 칸포 원년(1741년)에 막부에서 보상(호상)되었습니다 . 친효행의 상으로서 긴코(긴스) 20장을 주어지고, 그 후 이 부근의 공섬지(쿠우칸치)와 그 개간료(카이콘류)를 받은 나가고로는, 타지 2초(쵸) 남 을 개간했다고 합니다. 이 땅은 공동묘지의 서쪽 일체로, 「코시멘」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효자 나가 고로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에 의한 곳이 많아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쇼토 쿠비를 건립 할 때 쓰여진 「효행장 고로」 2세키스루 하조서」(오시타치·가와사키 키요시 가문서, 쇼와 2년)라고 하는 사료에 보상(호쇼)의 경위나 나가고로의 경력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개략을 소개합니다.
나가고로는 겐로쿠 3년(1690년) 오시다테 마을의 농가로 태어났습니다. 나가고로의 집은 갑자기 부유하지 않고 7간(켄) X3간반의 작은 굴립주(호타테바시라)의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6살 때 아버지가 사라지고 14살 때 동거하던 누나 부부가 병사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것의 아내가 병사하고, 후부도 병사한다는 불운한 눈에 맞았습니다. 그 후 80세를 넘는 어머니와 3명의 아이들을 들고 괴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처지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효행이 계속된 것입니다만, 그 효행이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동사료에 의하면, 몇개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농작업 사이에 그는 장작을 들고 판매에 나갔다. 어머니가 선천적인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장작 매도의 귀가에는 반드시 어머니를 위해 술을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여름의 밤은 모기에 빠지지 않도록 철야에서 어머니의 베개에 모기를 쫓고, 겨울의 밤은 퍼니스 옆에 자고 자신의 옷을 벗고 어머니에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인근 마을들에게까지 전해져, 오시타테 마을의 명주(나누시)로부터 오시타리 닛타(신덴)를 지배하는 대관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에도 막부의 사찰 봉행(지샤부교)에서, 관동 각지의 닛타·치수 정책을 담당하는 관동 지방 미용 카케(칸토 우지카타 고카카리)라는 직업에 대해서 있던 오오카 에치젠 모리 다다시(오오카에 치젠의 물기)까지 보고되게 되었습니다. 오오카 타다스케는 에도의 관공서에 나가고로를 불러, 그의 효행을 칭찬한 후, 긴코 20장과 논 7 반보를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오카 에치젠(오오카에치젠)에 의한 포상은, 단순히 그의 행위에 감동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행해진 타케호 개혁(쿄호카이카쿠)의 포상 정책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어 막부의 농촌 지배의 일환으로서 실현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가고로는 호력 11년(1761년)에 71세의 생애를 닫았습니다. (오타 난보)(소산인)은 막부의 지배계정역(시하이칸조야쿠)로서 타마가와 미회의 도중 이 땅을 방문해, 나가고로의 이야기에 감동해 노래를 부르며, 그의 행위 을 접했습니다.
(참고자료.「이나기시사」상권 제4편)
나가고로의 묘석
압립공동묘지 서쪽의 효자면
「효자 나가고로니 세키스루 하조서」
대전남축의 노래(천덕비의 뒷면)
쇼와 3년 건립의 도덕비
이나기시 교육부 평생 학습과 전화: 042-377-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