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갱신일:2017년 6월 27일
다이마루무라 그림(아시카와가 문서 96)
다이마루 지구의 다이마루 교차로 근처에 있는 아시카와가에는 에도시대의 고문서 152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고문서의 내용은, 검지장(켄치초), 마을 명세장(무라메이사이초), 마을 그림, 다이마루 용수 관계 문서, 소송 관계 문서 등으로, 에도 시대의 다이마루무라의 모습이나, 거기서 살았다 농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문서의 작성 연대는, 연보(엔포) 원년(1673년)부터 메이지 3년(1870년)까지의 197년간, 그 사이에 다이마루무라의 마을 관리인을 맡은 아시카와가에 보존되어 있었다 것입니다. 귀중한 근세 문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기본사료를 소개합니다. (아시카와가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의 근대 사료도 보존하고 있습니다.)
텐포(텐포) 7년(1836년)에 작성된 것으로, 닛타·하천·도로·산림·제경 등이 색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습니다. 또 타마가와의 하천 부지의 모습, 다이마루용수의 흐름, 용수 속에 만들어진 히로(히)의 위치, 엔조지(엔쇼지)의 앞에 있던 고찰장(고사츠바)의 모습, 하라지 신田(하라치신덴)등이 밝혀졌습니다.
막부의 계정 봉행(칸조부교) 칸오 하루오(칸오하루히데)가 연향(엔쿄) 3년(1746년)에 실시한 닛타 검지(신덴켄치)에 의해 작성된 검지 책(켄치초)입니다. 검지장에는, 토지의 일필(후데)마다 명소(나도로)(소재지명), 위부(정도)케(우에다(조덴)·나카타(츄덴)·시모다(게데) ) 등), 반별(단베츠)(토지 일필의 면적), 명청인(나우케닌)(경작자 혹은 경작권자) 등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사료로부터, 종래 입회지(이리아이치)였던 산림·하라노가 개발되어, 개인지의 토지로 분할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이마루 지구의 타마가와에서 취수해 만든 다이마루용수는, 유역 9개 마을의 논을 윤택하는 농업용수이며, 용수 조합을 조직해 유지·관리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료는, 타마가와의 홍수에 의해 용수 취수 시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안나이(안에이) 4년(1775년)에 구카무라의 대표가 용수 조합에 복구를 소원한 사료입니다. 다이마루 용수의 존재가 당시의 농업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는 영세한 농민이 늘어나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증가했습니다. 농촌이나 도시의 치안은 악화해, 그것에 대응하는 단속 조직으로서, 「간토 단속 이사역(칸토 우토시마리 슈트야쿠)」이라고 하는 직책이 놓여졌습니다. 이 사료에는, 관동 단속 이사(칸토 토토리시마리 슈트야쿠)가 회촌(카이소), 활동할 때의 구체적인 방법 등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오인조는, 인근의 고토에 의해 만들어진 치안 유지나 연공(넨구) 징수에 있어서의 연대 책임을 위한 조직이며, 촌락 생활의 상호 부조 기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료는 메이지 2년(1869년)에 작성된 것으로, 영주에 의한 제종의 금제 사항이 열거되어 농민에게 이것을 엄수하는 것을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메이지 3년(1870년)에 작성된 것으로, 다이마루무라의 전체상을 알 수 있는 사료입니다. 반별(단베츠), 이시다카(코쿠다카), 검지(켄치), 사사, 용수 보청(요시이 후신), 집수, 인구, 농간 여업 등이 기재되어, 당시의 마을 내의 모습이 이해합니다.
「차출 신이치 札之事」(용수 보청의 문서)
「관동향 단속 출역 수공」
「다이마루무라하라지 닛타 검지장」
“다이마루무라 오인조 어장 서상장”
「무사시쿠니 타마군 다이마루무라 명세서」
이나기시 교육부 평생 학습과 전화: 042-377-2121